선교

윌리암 캐리와 그의 동료들의 선교활동

나는왕자 2007. 4. 23. 16:26

 

라토렛(K. S. Laourette)은 [기독교확장사]에서 19세기를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1815년에서 1914년까지 이르는 99년 동안에 '기독교의 가장 광범위한 지리적 확장'이 이루어지고 기독교가 활동적으로 움직이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18세기에 발생한 캐리의 근대선교운동과 이후로 발생한 개신교 선교운동은 대체로 교회와는 별도로 조직된 선교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인도 선교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성공적인 선교를 수행했던 윌리암 캐리(William Cary, 1761-1834)의 사역을 통해 21세기 세계 선교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본다.

첫째는 확실한 팀 사역을 하였다.

흔히 ‘근대선교시대의 개척자“라고 부르는 캐리는 Joshua Marshman 과 William Word와 함께 사역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세람포르의 삼총사‘(Serampore Trio라고 부른다.

둘째, 교육 사역을 하였다.

1813년 Marshman의 주도하에 19개의 마을학교가 세워졌고, 4,000명 아이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1년이 못되어 45개 학교가 문을 열었고 1821년까지는 26개의 교회와 126개의 학교에 1만 명의 학생을 거느린 교육 사업을 하였다.

셋째, 자립 선교를 하였다.

캐리는 세람포르에 도착한 직후 캘커타에 있는 Fort William College의 동양어과 초빙교수가 되었다. 그가 얻은 수입은 세람포르 선교회를 확장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이 Tentmaking 선교사로서 스스로 일하면서 재정을 확보하여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는 세람포르 선교회를 외부지원에 의존하기보다 자립적이며 독립적인 선교를 감당함으로써 인도 현지상황에 맞는 선교를 효과적으로 감당하였다.

넷째, 번역 사역을 하였다.

이들 삼총사는 대형인쇄소와 출판사를 경영하여 30년 동안 40여개의 동양의 주요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출판하였다. 8개국의 신구약번역과 23개 국어의 신약완역과 10개 국어로 성경일부를 번역하였다. 1천 페이지에 달하는 산스크리트어 문법책을 비롯해서 많은 번역서들과 지방 신문도 발간하였다. 윌리암 캐리와 그의 동료들은 선교란 복음을 전파할 언어에 숙달할 뿐만 아니라 그 지방의 비기독교인들의 문화와 사상을까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 사례가 된다.

다섯째, 교회 개척사역이다.

이들이 인도에서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침례교 방식에 따라 교회를 조직하고 목사를 선출하는 일이었다. 인도의 개종자들이 인도에서 스스로 교회를 조직하고 정착하고 토착화 작업을 함으로써 영국 침례교회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운영을 하였다. 윌리암 캐리는 선교초기부터 유능하고 훈련된 인도 동역자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거대한 인도대륙 모든 곳에 복음을 전파하려면 오직 현지인 전도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819년 세람포르에 아시아의 기독교 청년 및 기독교인이 아닌 청년들에게 동양 문학과 유럽과학을 가르치는 최초의 대학을 세움으로써 그의 이와 같은 선교 비전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윌리암 캐리의 이러한 선교 전략과 노력의 결과로서 20세기 초까지 약 500만 명이 넘는 기독교인이 탄생하였다. Christopher Smith 박사는 윌리암 캐리에 대해 “그는 영국 제국주의의 역사인 Pre-Victoria 시대에 영국 복음주의자들의 이상과 가치와 영감들을 구현시킨 사람이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