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성경학교, 수련회를 앞두고
해마다 여름철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어릴 때의 여름성경학교에 대한 기억이다. 여름성경학교는 평소 주일예배와는 다르다. 예배와 성경공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지만, 평소에 듣지 못했던 동화도 있었고, 그리기, 만들기, 또 새로운 노래 배우기 등이 있었다. 새벽, 오전, 오후, 밤, 하루에 세 번 이상씩 모여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웠다. 새노래는 복음적인 동요들이었다. 또 오후 시간에는 동네 넘어에 있는 큰 둑이 있었는데, 거기까지 걸어가서 기도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손수건 돌리기 등 재미난 놀이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거저 그 시간이 기다려졌고 행복했다. 그 때에 배운 노래는 다음 해 성경학교를 할 때까지 부르고 또 불렀다.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 노래들이 기억 속에 남아서 혼자서 흥얼거릴 때가 있다.
조금 자라서 중학생이 되고 나서부터는 여름성경학교 외에 학생수련회가 있었다. 수련회 또한 신나는 것이었다. 수련회 때는 개 교회 단위가 아니라 지방에 있는 모든 교회들에서 학생들이 함께 모였다. 70년대 초였으니 수련회비로 돈보다는 쌀을 얼마씩 가지고 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처음 보는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말씀과 특강, 또 SFC Song 이라는 노래도 배웠다. 그런데 그 하기수양회에 참석하기 위해 몇 달을 기다렸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주일학교의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이것은 일꾼이 없었던 시골교회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 채, 옛날을 회상하며 준비하였고, 가르쳤다. 그러다가 신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주일학교뿐만 아니라 중고등부 학생들을 가르치는 전도사가 되어 있었고, 또 열심히 가르쳤다. 지금 생각하면 무엇을 어떻게 하였는지 잘 모른다. 열심히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놀라운 일들을 성령님께서 준비하셨다고 생각된다.
지금은 각 교회에서 초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는 여름성경학교, 또는 성경캠프를 여는 교회들이 많아졌고, 좋은 시설을 갖춘 기도원이나 수양관 등에서 수련회가 열리고 있다.
사실 내가 자라던 어린 시절은 다른데서 재미있는 것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학교 갔다 오면, 들로 논으로 꼴을 베러가거나 소를 몰고 나가서 꼴을 먹이는 등, 부모님의 일손을 들어드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니 그 때의 여름성경학교는 온 마을의 축제였다. 평소에 교회에 나오지 않던 친구들까지 다 나왔고, 목에 걸고 있는 출석부에는 새벽, 낮, 저녁 시간에 출석을 했다는 것을 알리는 빨간 도장이 찍혀졌다. 모든 것이 끝날 시간에는 각종 시상도 있었다.
올해도 여름성경학교가 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도심 속에서 사는 아이들에게 여름성경학교는 모이는 것에서부터 많은 힘이 든다. 학원에서의 보충 수업, 그것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다리기 학원 수업이 있고, 해외 연수를 위해 출국하는 어린이들도 있다. 여기에 인구 감소에 따르는 문제도 있다. 또 선생님들 가운데서도 직장에 매여서 시간을 쪼개기가 힘이 드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여름성경학교나 수련회는 여름방학이라는 기간을 통해 성경을 집중적으로 가르쳐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게 하고, 이웃을 바로 알고 사랑하게 하고, 주변의 문화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만들게 하는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여는 특별한 시간이다. 이 시간들이 어떤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사는 한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추억의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때의 신앙을 자랑스러워하며 살게 된다. 우리의 어린이들은 미래의 한국교회와 사회, 국가를 짊어지고 나갈 일꾼들이다. 담당자들은 영의 풍성한 잔치가 되도록 기도하며 준비해야 하고, 부모님들도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어야 한다. 어린이를 위해 투자하는 교회는 미래가 있다. 어린이를 위해 풍성한 영의 잔치가 되도록 영의 잔치가 되도록 기도하며 준비해야 한다.
미국에 워너메이커라는 부자가 있었다. 그는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더 유명한 것은 체신부장관이 되었을 때, 주일학교 교사를 하지 못한다면 체신부장관이 될 수 없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일생동안 펜실베니아 필라델피아에 세워진 베다니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어린이의 교육이 중요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