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인의 언어" -(야고보서 18)

나는왕자 2022. 4. 23. 09:32

주영광의 강단 22-15 (2022. 4. 3. 주일설교) - 야고보서(18)

“그리스도인의 언어”

(야고보서 3:2-12)

야고보서 3장 1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선생’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의 높임말입니다. ‘학문이나 기예가 뛰어난 사람’을 선생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분야에서 자기보다 경험이 많거나 잘 아는 사람을 선생이라고 합니다. 또 ‘사람의 성(姓)’이나 이름에 붙여 ‘000선생’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선생’(先生)이라는 말의 한자 의미는 ‘먼저 태어난 자’, ‘먼저 사는 자’, ‘앞서 있는 자’ 등입니다. 이들은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이 배우고 경험한 것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먼저 믿은 자가 늦게 믿은 자에게 영적인 것을 말과 행동으로 전해주고 가르치는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선생이라는 존재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선생은 좋은 것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학교(초, 중, 고, 대)에서, 학원에서 이들은 기초 학문을 비롯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 등 생을 유익하게 하는 것들을 가르치고 인생의 길을 안내하는 자입니다. 선생이 제자의 유익을 위하여 좋은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를 유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육신의 유익을 위해 가르치는 자입니다. 한편 이들과는 달리 영혼의 유익을 위해 가르치는 선생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들입니다(엡 4:11, 고전 12:28, 롬 12:7).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그 말씀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르치며 생에 적용하도록 인도하는 자입니다(마 28:20, 행 13:1, 28:31, 딤후 2:2). 여기에는 목사와 장로, 신학교 교수, 교회 교사들이 포함됩니다. 이들은 선생이라는 직분을 하나님의 백성의 영혼을 위한 사명으로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4절을 보면,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줄 수 있는 사람이 선생입니다. 이들은 제자된 자들의 영혼의 구원과 성장, 성숙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애쓰고 힘써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많은 사람이 선생이 되려 한다는 것을 안 야고보는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Μὴ πολλοὶ διδάσκαλοι γίνεσθε)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의 문자적 의미는 ‘너희는 큰 선생이 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책임성 있는 선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또 이 말은 지적으로,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준비된 선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선생은 한 영혼 한 영혼을 천국으로 이끄는 역할도 하지만, 한 영혼을 파멸로 가게 하는 역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책임은 무한합니다. 또 이 말은 ‘너희는 스스로 자기를 큰 선생이 되려고 하거나 큰 선생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선생된 자는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를 잘못 가르쳐 실족케 한 선생에게 하나님께서는 실족케 한 그 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이어진 본문은 선생된 자는 말을 조심하기 위해 혀를 제어해야 한다는 것과 혀를 제어하지 않을 때 일어날 엄청난 비극을 말하고, 우리의 혀를 어떤 일에 사용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언어”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Ⅰ. 그리스도인은 혀를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2-4절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 중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하여 한두 번의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하고 크게 탓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실수를 여러 번 반복하면, 사람들은 그 실수를 고의(故意)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주워 담지 못한다’는 말처럼 입에서 나온 말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실수’라고 번역된 말 ‘프타이오’(πταίω)는 ‘발을 헛디디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발을 헛디디면 자신이 다칠 수는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거의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의 실수는 자기 뿐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죄가 없는 완벽한(perfect)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성숙한(mature)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엡 4:13). 성숙한 신앙의 사람은 시의적절한 말과 상대를 배려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아름다운 말을 합니다(잠 25:11).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하였습니다. ‘굴레 씌운다’라는 것은 ‘통제하다’, ‘억제하다’, ‘속박하다’라는 의미의 상징입니다. 짐승에게 굴레를 씌워 행동을 통제하듯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혀를 잘 제어합니다. 여기에서 야고보는 두 가지 예를 들어 혀를 제어할 것을 말합니다. 첫째는 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3절)고 하였습니다. ‘재갈’은 사람이 말을 길들여 부리기 위해 말의 입에 물리는 도구입니다. 기수(騎手)는 재갈의 양 끝에 달아놓은 고삐를 당겨 말의 행동을 제어하고 통제합니다. 둘째는 배의 방향을 잡아주는 키(rudder)입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4절)라고 하였습니다. 광풍이 일어난 바다에서 배(ship)가 방향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배의 뒷부분에 설치해 놓은 ‘키’ 또는 ‘타’(舵)라고 하는 작은 도구 때문입니다. 폭풍이 불어 무서운 파도가 일어났을 때도, 사공(조타수)은 작은 키로 배가 나아갈 방향을 잡고 운행합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혀를 잘 제어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말(馬)의 동작을 제어하는 것은 재갈이라는 작은 도구입니다. 큰 배의 방향을 바로 잡는 것은 배에 붙어 있는 작은 방향키입니다. 그처럼 인체 중에서 아주 작은 혀이지만 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잠언 10장 19절에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25장 28절에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혀를 제어하는 사람이 인생을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 혀를 제어하는(control) 자입니다. 

 

Ⅱ. 그리스도인은 인생을 더럽히고 불사르도록 혀를 방치하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 5-8절에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큰 것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신체 중에서 ‘혀’는 지극히 작은 지체입니다. 혀는 음식을 씹을 때, 골고루 씹을 수 있도록 돕고, 음식의 맛을 느끼는 역할도 하지만, 입과 함께 말과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혀가 큰 것을 자랑한다는 말은 오만하고 허영심에 차서 말을 함부로 하고, 자기를 과대 포장하고 거짓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칼빈(John Calvin)은 “우리의 혀가 절도를 지킨다면 우리의 전반적인 생활에 대한 고삐의 역할을 하지만 그것이 무례하고 난폭하게 되면 온 집을 불사르는 한 개피의 성냥이 되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혀’는 말과 인격을 상징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혀는 입으로 나오는 부정적인 의미의 말(언어)을 의미합니다. 말은 모양도 없고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사람들을 기쁘게도 하고, 아프게도 하고, 깊은 상처를 주며, 심지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도 합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말은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혀를 제어하라고 한 것입니다. 

 

1. 혀를 제어하지 못하고 잘못 사용하면, 혀는 인생을 송두리째 태우는 불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 5-6절에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라는 말은 얼마 전에 일어난 동해안 산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지난 달 동해안 지역인 울진, 삼척에 일어난 산불은 경북 울진군 4개 읍, 면, 강원 삼척시 2개 읍, 면을 태웠습니다. 주택 319채를 비롯해 총 643곳의 시설물에 피해를 내었고, 피해 면적이 2만523.25ha라고 합니다. 이 어마어마한 산불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직은 수사 중이지만, 담뱃불이거나 실화일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아주 작은 불씨가 이렇게 엄청난 피해를 남긴 것입니다. 이처럼 작은 혀이지만 잘못 사용할 때, 그것은 인생을 송두리째 태우는 불이 된다는 것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잠언 16장 27절에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일을 모의하는 불량한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맹렬한 불과 같다는 것입니다. 혀를 잘못 사용하면 불과 같이 인생을 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혀는…불의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불의’(‘아디키아’, ἀδικία)는 ‘행악’, ‘공평하지 못한 것’ 등을 말합니다. 이것은 혀가 불의한 말, 악한 말을 쏟아내면 그의 인격은 불의한 세계에 사는 자가 되고 결과적으로 파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불의가 가득하도록 조장하는 도구도 혀입니다. 혀를 잘못 사용하면 자신의 인생도 망치게 되고, 세상에 악을 가득하게 만듭니다. 전도서 5장 6절에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 때, 광우병 소동이 있었습니다. 국내에 미국산 소고기가 들어오고, 그것을 먹으면 뇌에 구멍이 뚫리고 피를 흘리며 죽는다는 황당한 선동이 있었습니다. 그때 정치인, 언론, 만화가, 연예인, 심지어 종교인 등이 선동하였고, 국민은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국민 중에서 미국산 소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린 사람이나, 광우병으로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말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삶의 수레바퀴’라는 말은 인생의 전 과정을 가리킵니다. 혀를 잘못 사용하면 사람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인생을 망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을 파괴하는 죄의 불은 그 근원이 지옥입니다. 지옥에서 나온 불이 사람들의 삶을 태우고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제어되지 않은 혀에서 나온 거짓말, 악담, 저주 등의 말들은 지옥 불에서 나온 사탄이 인생을 부추겨 불행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거짓을 말하고 남을 모욕하며 저주하며 선동하는 것은 지옥에 들어갈 사탄의 조종을 받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습니다(막 9:43). 지옥은 거짓말하고 저주하고 미혹하는 사탄과 그 졸개들이 들어가 거할 장소입니다. 사탄의 조종을 받으며 사는 악인들은 그 사탄이 지옥에 던져질 때, 함께 지옥으로 던져질 것입니다(마 25:41, 계 19:10, 22:2-3). 마태복음 5장 22절에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을 복되게 하고 성공으로 이끄는 것도 혀의 말이지만, 혀를 제어하지 않으면 혀가 자기 인생뿐 아니라 남의 인생까지 망치게 합니다.

통제받지 않고 나불대는 혀는 인생과 사회를 병들게 하고 망칩니다. 잠언 17장 20절에 “마음이 굽은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 

 

2. 혀를 제어하고 길들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본문 7-8절에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피조물들로 여러 가지 성질을 가진 짐승과 생물들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사람에 의해 길들여집니다(창 1:28, 시 8:6-8). 여기에서 ‘길들이다’(‘다마조’, δαμάζω)라는 말은 제어하여 유용하고 유익한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납고 무서운 성질의 동물을 인간이 길들인다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무서운 매나 독수리를 훈련하여 새를 잡는 데 사용하고, 큰 말을 길들여 목적에 따라 유용하게 사용합니다. 개도 종류에 따라 시각장애자를 인도하는 안내견으로, 사냥하는 사냥개, 마약 등을 탐지하는 탐지견, 위험한 상황에 빠진 자와 실종자를 찾는 구조견으로 훈련하여 길들입니다. 또 사람들은 호랑이, 곰과 같은 무섭고 덩치가 큰 동물도 길들이고, 코끼리, 원숭이, 물개도 길들여 사람들에게 웃음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혀는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혀를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입에 독이 있는 동물처럼 말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고, 심지어 영혼을 파멸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상 모략하는 말, 참소하는 말, 조소하는 말, 아첨하는 말, 논쟁을 일삼는 말, 남을 저주하는 악담, 남을 속이는 거짓말 등 악한 말들이 모두 혀에서 나옵니다. 쉬지 아니하고 악을 쏟아내고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한 말이 혀에서 나옵니다. 남의 인격에 상처를 주고, 인격을 살인하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지옥과 같은 삶을 살게 만들고, 영생으로 가는 길에서 돌이켜 지옥으로 가게 만들 수 있는 것도 길들여지지 않은 혀에서 나온 말 때문입니다. 시편 140편 2-3절에 “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을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로마서 3장 13절에도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누구도 혀를 길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흉악한 말을 하는 사람이라도 그를 통제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인생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주님입니다. 그 주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인생의 안에 오신 성령은 인생의 혀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막 13:11, 롬 8:26, 엡 4:3).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시 139:1-4, 빌 4:7). 성령의 통제를 받으면 우리의 입에서 악담, 저주, 원망하는 말, 거짓말 등은 사라질 것입니다. 성령의 통제, 주님의 능력 아래 지배를 받는 언어는 자신과 타인을 유익하게 합니다. 

 

Ⅲ. 그리스도인은 혀를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본문 9-10절에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사람이기 때문에 약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했던 입으로 남을 속이고 저주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시편 117편 1절에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을 찬송했던 그 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합니다(시 62:4).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거룩하게 예배하고 찬양하였는데, 예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면 형제와 사람들과 다투고 욕하며 저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조금 전, 하나님을 찬송할 때의 감격과 은혜는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리라’는 결심은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한 그 입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며 저주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본문 11-12절에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샘에서 나온 물이 단맛과 쓴맛을 동시에 낸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나무에서 두 가지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마 7:16-18).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자연에서 얻는 교훈입니다. 

 

여러분! 

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지체입니다. 여러분은 혀를 어떻게 사용합니까? 비록 작은 지체이지만 이 지체는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질 지체입니다(개역한글, 롬 6:13). 하나님께서 주신 혀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축복하는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웃을 축복하는데 사용되는 것도 혀입니다. 반면에 쉬지 않고 악을 쏟아낼 수 있는 것도 혀입니다. 타락한 인생이기에 그대로 두면 그 혀는 자신을 망치고 남을 망치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잠언 21장 23절에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혀를 제어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축복하기 위해 사용하여야 합니다. 나의 혀를 제어할 수 있는 분은 주님의 성령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나를 주장하도록, 성령께서 내 안에서 내 마음과 내 혀와 손과 발을 지배하도록 그를 의지합시다. 나의 혀가 성령의 통제를 받도록 그분을 의지합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혀로 하나님께 찬양하며, 이웃을 축복하는데 사용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