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업신여기지 말라

나는왕자 2022. 1. 28. 13:52

주영광의 강단 22-05 (2022. 1. 30 주일설교) 야고보서(13)

“업신여기지 말라”

(야고보서 2:5-7)

 

앞 선 본문(2:1-4)에서 야고보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기본적으로 평등한 지위의 집단이나 특정한 사람을 자의적인 기준에 의해 불평등하게 대우함으로써, 특정집단이나 사람을 사회적으로 격리시키는 통제 형태를 차별’(差別)이라고 합니다. 사회에는 이런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지만 성경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임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모자람이나 결점이 있는 것을 알고 차별하는 것은 믿는 자의 행동이 아닙니다. 나 역시 모자람이나 결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유한 자입니다.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사랑으로 대하신 주님을 우리도 닮아 차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야고보는 교회에서 부자에게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모르는 척하거나 아무 데나 앉으라고 한다면 이것이 차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2-3). 이렇게 차별하는 것은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2:4).

오늘 본문(5-7)은 앞선 말씀(1-4)에 대한 보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또 다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는 말씀으로 본문을 시작합니다(5).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도들을 부르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목사는 형제를 대하듯이 성도들을 사랑으로 대하여야 하고, 성도들 역시 사랑하는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성도들을 대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형제이다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면 서로 차별하는 일은 없어질 것입니다.

본문은 특히 가난한 자(특정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6절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업신여기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티마조’(ἀτιμάζω)모욕하다’, ‘능욕하다’, ‘창피를 주다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개역한글성경에는 괄시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남을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이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업신여기는 것은 차별하는 것에서 더 나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말라고 했던 야고보는 모욕하고 능욕하며 창피를 주는 것과 같은 일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Ⅰ. 업신여기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 하나님께서 부요하게 하신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에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택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選擇)을 말하는 것입니다(ἐκλέγομαι, he hath chosen). 선택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신 것을 말합니다(1:4-5). 선택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행하신 일입니다. 그 사람이 세상에서 부하게 될 것인지, 가난하게 될 것인지, 권력이 있을 것인지, 아무 권한이나 힘이 없을 것인지 등은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아무 조건도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무조건적이고 기쁘신 뜻, 선하신 의향대로 된 것입니다(30:14, 41:25, 45:9, 18:4, 6, 9:21).

가난한 자’(ὁ πτωχς)는 실제로 가난한 자들을 말하기도 하지만 영적으로 가난한 자를 말할 때도 이 말을 사용하였습니다(66:2, 5:3). 특별히 정관사가 있어서 특정한 자, 또는 특정한 집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선택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택하신 이유는 믿음에 부요한 자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경제적으로 부한 형제도 있지만 가난한 형제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부하다고 하는 것 때문에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는 것 때문에 형제들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멸시를 받을 문제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가난하다고 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기준은 그가 가진 믿음입니다(2:8, 1:12, 3:16, 4:1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양 옆에는 흉악한 강도 두 사람이 나무에 달려 사형집행을 당하였습니다. 이들은 세상에서 악하고 나쁜 일만 했습니다.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순간에 한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습니다(23:42).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은 돈이나 권력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1:13, 2:8). 주님은 그 사람에게 천국 낙원을 약속하셨습니다(23:43).

요한계시록 29절을 보면, 육신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 부유한 자들이 나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중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환난을 만나 이리저리로 유리하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물질의 부요함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궁핍했습니다. 지금도 이슬람 지역에 있는 성도들은 대부분 직장도 얻지 못하고 궁핍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였습니다. 자신도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으면서도 같은 처지에 있는 형제들을 만나면, 집으로 맞아들이고 대접하였습니다(1:17, 요삼 1:8). 이들이 믿음에 부요한 자, 소망에 부요한 자, 사랑에 부요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천국을 가슴에 담고 사는 영적인 부자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주님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엾게 생각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영적인 가난을 안고 살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 317절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많은 재물이 있다’, ‘내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 ‘나는 내가 갖고 싶은 것은 다 가지고 있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그 사람을 가리켜 곤고한 사람’, ‘가련한 사람’, ‘가난한 사람’,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사람’, ‘벌거벗고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물질이 많아도, 창고에 많은 곡식을 쌓아 놓았어도 영적으로 텅텅 비어있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12:13-21).

어떤 부자 청년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 청년은 하나님의 계명도 잘 알고 잘 지킨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9:21)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염려하면서 돌아갔는데, 재물이 많은 것 때문이었습니다(19:22). 자기를 비우는 자만 하나님의 것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믿음에 부유한 자로 택하신 형제를 우리가 업신여기는 것은 그를 택하신 주님을 업신여기는 것이 됩니다.

 

2.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에 하나님이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을 문법을 따라 다시 번역해 보면, “들으라,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믿음에 부요한 자들로 선택하셨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가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들로 선택하시지 않았느냐입니다.

여기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자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18:1, 21:17).

약속하신 나라는 하늘의 기업인 천국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 나라를 기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78절에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출애굽기 68절에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것은(12:7, 24:7, 26:3, 35:12, 1:8, 7:13, 16. 1:6, 22. 9:8) 신약교회의 구속받은 성도들에게 천국을 기업으로 주실 것에 대한 표상입니다. 갈라디아서 3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47절에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가난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여 그 나라의 상속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25:34)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그 나라를 상속받는 것은 그가 가진 믿음 때문입니다(5:21, 11:13-16).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 하나님이 임금이신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이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두 나라의 시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주님 나라의 시민으로 교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동시에 세상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3:20). 그래서 세상에서는 가난하다는 것 때문에, 또 다른 이유들로 차별과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할 것은 우리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자라는 것입니다(1:12, 3:24, 6:17, 9:15).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두 사람은 세상에서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였으나 나사로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거지였습니다. 한 사람은 건강하였으나 나사로는 헌데를 앓으며 생명만 부지하고 살아가는 병자였습니다. 한 사람은 좋은 집에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연락하였으나 나사로는 좋은 옷은 고사하고 삶의 연락이라는 것은 생각도 해 본 일이 없이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연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한 사람은 하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였으나 나사로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고,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할 수 없는 자였습니다. 한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환영을 받았고 높은 자리에 앉혀 졌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관심 밖의 사람, 존재 가치도 없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습니다. 나사로는 어디에서도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거지라는 것 때문에, 냄새나는 병자라는 것 때문에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개들도 그의 헌 데를 핥았기 때문에 죽음의 고통을 맛보며 살았습니다. 대문에 누워 있는 나사로를 보면서 그 집 주인인 부자가 곱게 대했을까요? 그를 천사처럼 생각했을까요? 아마도 보기 싫은 짐승처럼 대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 그는 무한히 업신여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후(死後)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거지였던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갔고, 부자는 음부로 갔습니다. 가난한 거지였던 나사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나라를 상속받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나사로를 업신여겼지만, 하나님은 나사로를 존귀한 자로 인정해 주었습니다(43:2, 4).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자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그에게 천국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는 가난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육신적으로는 가난하지만 믿음에 부요한 자, 소망에 부요한 자, 사랑에 부요한 자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영광의 나라를 상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행복한 자들입니다(5:3, 4:18, 6:20), 그러므로 주 안에서 한 형제인 성도들을 차별하거나 멸시하며 업신여기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Ⅱ. 어떤 행동이 형제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1.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억압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카타듀나스튜오’(καταδευναστεΰω)는 사람을 하대하여 압박하고 착취하며 이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돈이 있으면 무죄로 풀려나지만 돈이 없을 경우 유죄로 처벌받는다는 것으로, 사법부와 검찰에 대한 불신을 비꼬는 말입니다. 인권이 많이 개선된 오늘에 있어서도 돈이 없으면 잘못이 없음에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돈이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은 잘못을 저질러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나가는 정당하지 못한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잘못한 일이 없음에도 억압을 당하고 죄가 씌워져 법정으로 끌려간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2.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본문 7절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비방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블라스페메오’(βλασφεμέω)신성모독하다’, ‘비방하다’, ‘모욕하다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구절을 표준새번역에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성도에게 주어져 있는 이름은 모두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성도’, ‘의인’, ‘유업을 이을 자’ ‘성령받은 자’, ‘중생인등의 이름은 얼마나 고상하고 좋은 이름입니까? 사탄은 우리가 이 고상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하고 비방하며 훼방합니다. 사탄이 사람들을 이용하여 이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며 모욕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5장을 보면, 나발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말하여 상처를 주는 악하고 미련한 부자였습니다. 사울의 핍박을 피하여 광야로 피신해 있던 다윗이 어느 날, 굶고 고생하는 자신의 부하들을 위하여 가까운 곳에서 양을 치고 있는 나발에게 부하 몇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광야에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나발의 양떼들까지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움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발은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라며 거절하였습니다(삼상 25:10-11).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을 멸시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그는 다윗이 누구냐?’며 비방하였습니다. 그는 자기만 아는 자였습니다. 자기 배만 부르면 그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금의 자비도 베풀 줄 모르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업신여긴 그는 스스로 망하고 말았습니다(삼상 25:37-38).

 

여러분!

여고보는 당시의 돈 많고 권력이 있다는 부자들이 가난한 성도들을 업신여기는 행동 두 가지를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성도들을 억압하고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였습니다.

오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를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깔보며, 죄를 덮어씌우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23, 창원지방법원 밀양지원에서 횡령 및 장애인복지법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B(65)씨와 그의 아내 C씨에 대한 선고가 있었습니다.

B씨와 C씨는 농사를 짓는 부부로, 지난 2009년부터 지난 202012월 중순까지 약 12년간 지적장애가 있는 A(50)씨에게 보수를 주지 않고 일을 시켰고, A씨에게 나오는 장애인연금과 수당 등 약 8,100만원까지 가로챘습니다. 그런데 B씨 부부는 A씨 여동생의 시부모였습니다. A씨와는 엄연히 사돈 관계였습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A씨는 B씨 부부를 주인집 아저씨’, ‘주인집 아주머니라 부르며 열악한 환경에 거하면서 과수원 일을 도왔습니다.

A씨는 재판을 받는 동안 재판장의 질문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중증 지적장애가 있었고, 본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데도 서툴렀다고 합니다. B씨 부부는 A씨가 지적장애가 있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사회생활이 어렵다는 점을 악용했던 것입니다.

판사는 피고인들의 범죄로 A씨는 10년이 넘는 기간 사회로부터 사실상 단절된 채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과 가치가 중대하게 훼손되고 인격이 유린당했고, 국가로부터 응당 받아야 할 경제적 도움을 받을 권리마저 장기간 박탈당했다며 무거운 형을 선고했습니다(조선일보, 2022. 1. 23. 추웠어요사돈에 12년간 착취당한 지적장애인의 한마디).

이것은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를 억압하고 멸시하며 업신여기고 착취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모두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자기가 가진 재물로 불쌍한 이웃을 돕고 하나님을 섬기는 부자도 있습니다(31:16-22, 32).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말라고 했던 야고보는 본문에서 업신여기지 말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업신여긴다는 것은 사람을 하대하고 무시하고 멸시하는 생각과 행동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모두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 믿음에 부요한 형제입니다. 하늘나라를 받은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슬픈 일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일에 앞장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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