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광의 강단 22- (2022. 2. 27 주일오전예배설교) -야고보서-
“참된 믿음”⑵
(야고보서 2:20-26)
지난주일, 우리는 야고보서 2장 14-19절 말씀에서 ‘참된 믿음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참된 믿음에는 선한 행실이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선한 행실로 증명되지 않는 믿음, 즉 말만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9절)고 했던 야고보는 이제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20절)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만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참된 믿음을 소유했던 두 인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믿음의 내용을 보며 “참된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행동으로 증명된 아브라함의 믿음
본문 21절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을 ‘우리 조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조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창 48:16, 출 3:6, 15, 신 1:8, 6:10, 29:13).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아브라함’을 그들의 ‘조상’이라고 합니다(마 3:9). 유대인들이 증오하는 아랍인들도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나 아랍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는 상관없이 아브라함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혈통을 따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아브라함을 ‘우리 조상’이라고 합니다(롬 4:1, 12, 약 2:21).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을 동일하게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브라함을 ‘우리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태어난 영적 혈통이기 때문입니다(요 1:13).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롬 4:16).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따르면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몇 가지 사례를 통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말씀을 믿고 따라 나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고, 그곳에서 모든 기반을 잡고 살았습니다. 그 도시의 사람들은 많은 신들을 섬겼습니다. 엉거(Dr. Merrill F. Unger)에 의하면 ‘난나’(Nanna)라고 하는 달신(月神)을 주신(主神)으로 믿었습니다(「Bible Handbook」, pp. 60-61). 난나라는 신은 농사를 잘 되게 하는 신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상들도 갈대아 우르에서 난나라고 하는 신과 다른 신들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그 가운데서 살았습니다(수 24:2). 어느 날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시고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나갔습니다(창 12:4).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요,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행동)이었습니다.
2. 아들을 주신다고 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자손’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1-3).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 12:7-8, 13:18). 그런데 많은 세월이 지나도 자식이 없자, 어느 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투정을 부렸습니다.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창 15:2-3)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창 15:4)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의 별들을 보게 하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창 15:7)고 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그렇게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義)로 여겨 주었습니다(창 15:6).
자손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창 12:2, 13:14-16, 15:4-5, 13-21, 17:4-8, 16-19, 18:10-14, 22:18).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백 세 때에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창 21:1-5). 로마서 4장 18-22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그를 의롭게 하였습니다.
3.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드렸습니다.
본문 21절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에 이삭의 출생은 온 가족과 이웃에게 기쁨과 웃음을 주었습니다. 그 아들이 자라 청년이 되었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인간이었기에 밤을 새며 고민하고 갈등하며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반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음 날 일찍 일어나 번제할 준비를 하고,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모리아로 가서 그를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었습니다(창 22:3-10). 이러한 아브라함의 행동을 본문은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22장 12절에는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1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그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히 11:17-19).
많은 세월이 흘러간 다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창 26:4-5)고 하셨습니다. 천하 만민이 네(이삭)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계명과 하나님의 율례와 하나님의 법도를 지켰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본문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말로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을 행동으로 나타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의롭다 함을 얻는 근거가 됩니다. 로마서 4장 23-24절에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히 11:17)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들을 보면 같은 사건을 가지고 야고보는 ‘행동’(이삭을 바친 것)을 말하고,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드린 것’(행동)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의 경우는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고 하였습니다.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간 것이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이나 아들을 번제로 드렸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행동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고 한 것이고,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행위’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과 야고보의 말씀을 종합하면 ‘믿음으로 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항상 행위가 따릅니다. 믿음은 행동을 수반하고, 행동은 믿음과 함께 일합니다. 그래서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은 행동이 따르고, 행동은 믿음을 증명합니다.
Ⅱ. 행동으로 증명된 라합의 믿음
본문 25절에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라합은 여리고라는 도시에서 기생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았던 여인입니다. 원문(‘포르네, πόρνη)을 따르면 그녀는 몸을 파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직업을 통해 가족들을 먹여 살렸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 낯선 두 명의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이었습니다.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 여호수아는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할 대임(大任)을 맡았습니다(수 1:10-11). 이런 상황에서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 싯딤에서 가나안의 첫 관문인 여리고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 성으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여리고의 성문 곁에 있는 기생 라합의 집에 머물면서 그 성의 형편을 살폈습니다(수 2:1, 15).
여리고를 정탐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라합의 집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여리고의 왕은 군인들을 보내 그들을 잡아 오라고 하였습니다. 군인들은 라합의 집으로 가서 그녀에게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고 하였습니다(수 2:3). 그때 라합은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수 2:4-5)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녀는 기지를 발휘하여 이스라엘의 정탐들의 생명을 보호하였습니다. 이미 라합은 그들을 지붕 위에 벌여 놓은 삼대 속에 숨겨 두었습니다(수 2:6). 군인들이 떠난 뒤에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여리고 성의 형편을 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수 2:9),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수 2:11)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수 2:9),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 2:11)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율법을 배운 일도 없었고, 하나님에 대해 학습한 일도 없었으나 하나님에 대해 이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녀는 자기 집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에 관해 들었을 뿐입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수 2:10)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이어 그녀는 이스라엘의 정탐에게 자신과 가족의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수 2:12-13)고 하였습니다. 이에 두 정탐은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수 2:14)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날 밤, 그녀는 두 정탐을 자기 집 창문에서 줄로 달아내려 평안히 가게 하였습니다(수 2:15). 그리하여 두 정탐은 무사히 여호수아에게 돌아가서 모든 사실을 보고하였습니다(수 2:23-24). 이러한 그녀의 선한 행위는 조국 여리고에는 역적이었으나 성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히 11:31).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를 점령하고, 여리고의 모든 것을 멸할 때, 이스라엘은 약속대로 라합과 그녀의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수 2:12-13, 6:22-23, 25). 이스라엘에 의해 구원을 받은 라합은 유다 지파에 속한 살몬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였고, 그녀는 다윗의 고조(古祖) 할머니가 되었고, 그녀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등재되었습니다(룻 4:19-22, 마 1:5-6). 이것은 그녀가 구원받은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입니다.
본문 25절에서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사자들’(οἱ ἀγγέλοι)은 여리고에 왔던 이스라엘의 두 정탐을 일컫는 말입니다. 라합은 그들을 접대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접대하다’라고 번역된 ‘휘포데코마이’(ὑποδέχομαι)라는 단어는 ‘영접하다’, ‘맞아들이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또 그녀는 ‘다른 길로 가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라합이 두 정탐을 본 순간부터 그들이 안전하게 이스라엘의 진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보호하고 인도해 준 사실 전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 25절은 “…기생 라합이…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의롭게 되다’라고 번역된 ‘디카이오오’(δικαιόω)는 ‘의롭다고 하다’, ‘의로 정하다’, 곧 ‘칭의’(稱義)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녀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 11:31)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멸망하지 아니하였다’(‘쉰아폴뤼미’, συναπόλλυμι)는 것은 함께 멸망 받을 자리에서 망하지 않고 구원받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요 3:16). 이처럼 야고보는 라합이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칭의)고 하였고,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멸망하지 않았다’(구원)고 하였습니다. 또 야고보는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고 다른 길로 가게 하였다’고 하였고, 히브리서 기자는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라합의 이러한 행동이 그녀가 의롭게 된 근거였고, 구원 얻는 근거였다는 것입니다. 행위로 칭의와 구원을 얻은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구원 얻고 칭의를 얻는 근거는 믿음이고, 라합의 행동은 그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라합은 정탐꾼을 영접하였고, 믿음으로 그들을 숨겼고, 그녀는 믿음으로 자신의 입술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또 정탐들을 안전하게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믿음의 행동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에게 구원과 칭의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신인협동교리(神人協同敎理)는 인간의 산물입니다. 구원과 칭의는 값없이 얻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은 죄와 멸망으로부터 값없이 받은 은혜이고, 칭의는 주님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가 멸망 받을 죄를 씻고, 그를 가려주신 것을 선포하는 법적인 용어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세상에서 죄 많은 삶을 살아왔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참된 믿음을 소유했던 두 사람, 아브라함과 라합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선한 행위들로 그들의 믿음을 증명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1절),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5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으나 아브라함이나 라합이 구원을 얻고 의롭게 된 것은 믿음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23절에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의 믿음은 정탐꾼을 숨기는 행동으로,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2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24절)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고,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만들어 자기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임금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희롱과 채찍질, 고난을 받았습니다(히 11:4-40). 믿음에는 믿음의 행동이 따르고, 행동은 믿음과 함께 역사합니다. 그래서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에서 행위를 떼어내면 참된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행위가 없다고 해서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다고, 전도하지 않는다고, 봉사하지 않는다고, 구제할 줄 모른다고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참된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여러분! 우리는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구원을 받았습니다(벧전 1:18-19). 여러분의 믿음의 행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증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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