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광의강단 22-09 (2022. 2. 20 주일오전예배설교) -야고보서(15)-
“참된 믿음”⑴
(야고보서 2:14-19)
주의 종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 있는 실제적인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차별하거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대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교회 안에 들어 온 가난한 성도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성도에게는 최고의 법이 있으니 그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최고의 법은 하나님 나라의 법으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는 사랑의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본문을 통해 참된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참된 믿음”이라는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Ⅰ. 거짓 믿음이 있습니다.
1. 행위로 구원 얻는다고 주장하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본문 14절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또 17절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형제들아’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 교회 안에 들어 온 형제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마치 행위에 의해 구원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구원이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는 믿음이 있다’,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입으로 떠들지만 정작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할 행함이 없는 것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입술로는 믿는다고 하는데,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행동하는 이중적인 삶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나무와 가지를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믿음과 믿음의 행위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그 행위로 나타내고 증거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라고 하는 것을 보면 믿음이 있는 사람이 분명한데,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생각대로 살고,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하는 주님의 교훈입니다.
어떤 분은 우리의 구원은 유보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 것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의 심판 때에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나 의롭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값싼 복음이다’, ‘구원에서 얼마든지 탈락될 수 있다’라고 합니다. 결국 이것은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강조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행위로 미래에 구원 얻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의롭게 살아야 하고, 얼마나 정의롭게 살아야 합니까?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값싼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은금(銀金)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 예수의 보배로운 피의 공로에 의한 것입니다(벧전 1:18-19).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사람들의 주장대로라면 십자가의 강도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됩니까? 주님의 말씀은 강도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알량한 거짓이 됩니다. 십자가의 강도에게도 낙원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그가 구원받았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공적, 그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일한 공적이 없는 구원, 불 가운데서 받은 구원입니다(고전 3:15).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함으로, 그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행 2:21, 4:12, 16:31).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일은 기독교 초기에도 있었습니다. 유대율법주의자들이 교회에 들어와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따라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교회에 혼란을 주었습니다(행 15:1).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나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할례를 행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행 15:11, 16:31, 갈 6:12, 엡 2:8).
일반적으로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 얻고(以信得救),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以信稱義)는 복음만을 강조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은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이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행실을 행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을 말한 바울은 9절에서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10절에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바울도 성도들의 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고 하였습니다. 야고보가 행함을 강조했던 것처럼 바울도 사랑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14절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한 것은 믿음이 있노라고 말하면서 믿음과는 동떨어진 행동을 한다면, 그 사람에게 구원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근 박사는 “믿음이란 머리나 입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마음으로 불신앙의 생활을 뉘우치며 자기의 혀를 자복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거듭나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는 행위가 자연히 따라 오는 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2. 동정심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본문 15-17절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헐벗고’라는 말은 옷이 없어서 벗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겨우 속옷만 입고 추위에 떨고 있는 형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은 매일매일 필요한 양식을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와 주변에서 우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 어려운 처지에 있는 형제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는 말만하였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기도해 보지요’라고 말하고는 돌아서 버렸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동정하고,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도움을 하나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동정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 쓸모없다는 것입니다. 칼빈(John Calvin)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태도를 “가난한 자에 대한 조롱이다”라고 하였습니다.
3. 지식에 그친 믿음도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본문 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입니다. 신명기 6장 4절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뿐입니다(출 20:3, 신 6:4, 슥 14:9, 마 23:9). 이 사실을 ‘귀신들도 믿고 떤다’고 하였습니다. ‘귀신’은 사탄의 졸개로(마 12:24), 귀신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귀신도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귀신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까지 찾아와 하나님을 불신하게 하고, 믿음에서 떨어뜨리게 하려고 괴롭힙니다(마 12:22, 45, 15:22, 막 1:23). 귀신들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고, 자신들을 멸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막 1:24, 5:7, 눅 4:34). 여기에서 ‘떠느니라’(φρίσσοω)는 말은 심한 공포로 떨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8장 29절을 보면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았습니다(막 3:11, 행 19:15). 귀신은 예수님 때문에 일어날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도 잘 알기 때문에 두려워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의 일입니다. 귀신이 들려 점을 쳐서 주인에게 많은 수익을 얻게 해주는 소녀가 있었는데, 그녀는 바울 일행을 보자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이다’라며 소리를 지르며 따라다녔습니다(행 16:16-18). 사도행전 19장 15절을 보면,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라고 하였습니다. 귀신은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처럼 귀신이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교리로만 아는 자가 있습니다. 교리적인 지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마음에서부터 나온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참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행위로 구원 얻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동정 없이 말만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런 믿음은 누구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사람들의 믿음을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7절).
Ⅱ. 참된 믿음이 있습니다.
1. 참된 믿음에는 선한 행위가 따릅니다.
본문 15-16절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도움을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하신 하나님(시 68:5)은 이스라엘에게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를 돌볼 것과 타국인, 나그네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신 10:18, 16:11, 24:17, 20, 26:12, 13, 19, 시 146:9, 사 1:17, 10:2, 슥 7:10). 신명기 14장 29절에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 경건의 행위임을 말하였습니다(약 1:27). 본문에서 야고보는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를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구제를 포함한 믿음의 선한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선한 행실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로만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독생자 예수를 보내어 십자가에서 우리 위하여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신의 사랑을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사 53:10, 요 3:16, 롬 8:32).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 백성인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사랑의 행위가 있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3절에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선행을 한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들을 쉽게 잊어버리지만 주님은 그 모두를 기억하십니다(마 25:31-46). 가난한 자를 돌아보고, 옷이 없어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옷을 입혀 주고, 마실 물이 없는 사람에게 물을 마시게 해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여 대접하고, 옥에 갇혀 있는 자를 찾아가 돌보아 주는 것이 사랑의 행위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사랑과 함께 역사합니다(고전 13:13).
2. 행함으로 증명되는 것만이 참된 믿음입니다.
본문 18절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보이라’, ‘보이리라’고 번역된 ‘데이퀴미’(δείκυμι)라는 단어는 ‘알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어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보고 야고보는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지 않고 동일하게 강조합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보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갈라디아서 3장 11절에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구원 얻은 것을 말한 바울은 구원받은 자들에게 행동을 말하였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에베소서 4장 1절에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차원적인 행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고 하였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행하신 위대한 사랑의 행위에 대한 인격적인 응답이 믿음입니다(요 1:12, 롬 10:9-10, 빌 2:11). 이 인격적인 응답은 신뢰와 충성, 감사, 사랑이라고 하는 행위가 동반됩니다.
여러분!
참된 믿음에는 선한 행위가 따릅니다. 행함으로 증명되는 것만이 참된 믿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엡 2:8). 그렇다면 아무렇게 살아도 될까요?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는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요 15:12, 17, 롬 12:10, 갈 5:13, 엡 4:2, 히 10: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도 야고보도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야고보도 믿음의 증거가 있는 삶을 강조하고 있고, 믿음의 증거는 사랑의 행위, 선한 행실을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복음에서 ‘믿음’이 강조가 되었던 것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 믿음보다 율법의 행위인 할례를 통해 구원 얻는다는 유대율법주의자들의 거짓 복음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한편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핍박과 환난 때문에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성도들이었습니다. 믿음은 있었지만, 사랑을 베풀 여유가 없었고, 점점 사랑을 잃어버렸고, 말로만 ‘믿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계 2:4) 그러다 보니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너희 믿음을 행동으로 나타내라고 한 것입니다. 여유가 없을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믿음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 확실한 근거입니다(엡 2:8).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선한 행동을 수반합니다. 선한 행동을 수반하지 않은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엡 2:10, 벧전 2:12, 17, 3:8-9). 선한 행위가 수반될 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뻐하게 합니다(히 11:6).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여러분은 말만의 믿음이 아니고, 동정심 없는 믿음도 아니고, 귀신들도 하나님은 한 분임을 믿고 떠는 것과 같은 지식으로 아는 것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사랑의 행동이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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