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광의 강단 22-7 (2022. 2. 6 주일설교) 야고보서(14)
“최고의 법을 따라 살라”
(야고보서 2:8-13)
『주홍글씨』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17세기 중엽, 청교도들이 사는 보스턴에서 일어난 간통 사건을 다룬 작품인데, 늙은 의사와 결혼한 헤스터 프린이라는 젊은 여인이 남편보다 먼저 미국으로 건너와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고, 젊은 목사가 그녀를 가엾게 여겼습니다. 그러는 동안 헤스터는 펄이라는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그녀는 간통한 벌로 공개된 장소에서 ‘A’라는 글자를 가슴에 달고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간음한 여인이라고 비웃고 비난하며 냉대하였습니다. 싱글맘이라 하여 오히려 격려하는 일이 많은 현대 사회의 시각으로는 이해가 어려울 수 있지만 청교도 사회에서는 결혼한 여자에게서 간음으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부당대우와 수모를 당했던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 주의 종 야고보는 형제를 차별하여 대하는 것과 업신여기는 일을 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한 마음으로 남을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를 차별하는 것이나 업신여기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차별하여 대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는 누구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신 형제요, 하나님 나라를 동일하게 상속받은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최고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최고의 법을 따라 살라”는 말씀으로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Ⅰ. 그리스도인에게는 최고의 법이 있습니다.
본문 8절에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사회든지 인간이 사는 사회는 나름대로 지키며 살아야 하는 규율과 규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세워 놓은 규칙이나 법을 어기면 ‘죄인’으로 취급을 받게 되고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그처럼 기독교회에도 교회의 ‘헌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와 성도를 보호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평안한 중에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이 헌법은 ‘기독교 신조’(信條)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신조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규율이나 법은 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인간의 동의를 얻어 만든 것이지만, 성경은 신적 권위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우리 삶의 영원히 변치 않는 표준입니다.
법은 인간이 범하는 죄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왜곡되고 삐뚤어진 욕망을 따라 살아가려고 합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최고의 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1. 최고의 법은 성경에 기초한 것입니다.
본문 8절에 “…성경에 기록된 대로…”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과 그가 행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전달해 준 말씀이 기록된 책입니다(벧후 1:21). 그 말씀은 우리가 믿을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와 그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의 예배 원리와 최고로 고상한 생활의 원리를 제공해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삶의 원리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리와 최고의 법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서 나온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 최고의 법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본문 8절에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마땅히 ‘성경에 기록된 대로’ ‘최고의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최고의 법’이라는 말 ‘노모스 바실리코스’(νομόσ βασιλικός)는 ‘왕적인 율법’, 즉 왕이신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한 계명이 최고의 법, 즉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계명’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십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한 것으로, 1-4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 5-10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했습니다. 이 두 가지 계명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지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갈 5:14)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고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신 이 계명을 가리켜 ‘최고의 법’이라고 하였고,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40)고 하였습니다.
또 ‘지키면’(τελέω)이라는 말은 ‘이루다’, ‘성취하다’ 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이 최고의 법을 성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의 이웃(τὸν πλησίον)입니까? 이웃집에 사는 가까운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성경은 이웃집에 사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이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10장에서 ‘이웃’을 비유(比喩)로 잘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는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게 만들어 놓고 가진 것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그 길을 한 제사장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강도를 만났던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하여 ‘사람 살려 달라’고 소리쳤을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는 레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도, 율법도, 자비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모두 강도 만난 사람을 못 본척하며 지나가 버렸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은 이제 살려달라고 소리칠 힘도 없어졌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또 한 사람이 그 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더니 불쌍히 여겨 나귀에서 내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싸매고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가서 밤새 보살펴 주었습니다. 다음날 그 사람은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이 사람을 잘 돌보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또 돈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말하고 떠났습니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부정한 사람으로 생각하였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원수로 생각하였습니다. 민족 관점에서는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고, 도와주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이처럼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참 이웃은 그를 도와 보살펴 주었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위기에 처한 사람,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둘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비 베풀기를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우리에게 해를 끼친 원수라 할지라도 그가 어려운 처지에 있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마 5:43-44, 눅 6:27, 35, 롬 12:19, 마 12:11). 레위기 19장 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장 43-44절에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성과 감정으로는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서 죽게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소유할 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최고의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법을 지켜 살아야 합니다.
Ⅱ. 사람을 차별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최고의 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차별하여 대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프로소폴렘프테오’(προσωπολημπτέω)라는 단어는 ‘얼굴을 보고 취하다’, ‘외모로 대하다’, ‘사람을 편애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 편견을 가지고 대하거나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일을 말합니다.
1.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은 최고의 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교회 안에 들어온 부자와 가난한 자를 대하는 교인들의 태도를 보았습니다. 부자에게는 높은 자리에 앉으라며 굽실거리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고 했다면, 이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입니다(약 2:2-3). 이처럼 사람의 외모나 얼굴, 재산이나 권력의 유무 등의 조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여 대하는 것이나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도움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차별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한 최고의 법을 어기는 것으로 ‘죄를 짓는 행위’이고, 율법은 이같이 행하는 자를 ‘범법자로 정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믿음과 사랑이 충만했던 처음 예루살렘 교회에도 차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어려운 과부들이 많았습니다. 과부들은 교회가 돌보아야 할 대상입니다(신 10:18, 딤전 5:3). 예루살렘 교회는 이들을 구제로 도왔습니다. 이것은 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구제를 시행함에 있어서 유대파 과부들을 우선시하고, 헬라파 과부들을 제외함으로 차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차별은 교회에 시험 거리가 됨은 두말할 것 없습니다(행 6:1-6).
이처럼 어떤 사람은 특별한 대우를 하면서, 다른 사람은 과소평가하고 소홀하게 대한다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실천하는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이것을 죄라고 하였습니다. ‘죄’(하말르티아, ἁμαρτία)는 하나님의 표준에서 어긋난 것을 말합니다.
2. 율법 중 하나를 범해도 최고의 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본문 10-11절에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각종 법이 있어도 법정에서는 그 사람이 범한 죄만을 다루며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율법은 한 가지만 범하여도 모든 법을 범한 것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간음’과 ‘살인’을 말한 것은 십계명에서 말하는 각종 죄를 대표적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살인이라고 하는 한 가지 죄를 범하였어도 그것은 십계명 중 5-10계명을 요약한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최고의 법, 하나님의 뜻을 범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 역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으로 최고의 법인 하나님의 말씀을 범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은 최고의 법인 자유의 율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본문 12-13절에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자유의 율법’이라는 말은 ‘자유하게 하는 법’을 말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율법의 하나만 범하여도 온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고 하는 율법의 조문 하나하나에 매여 살면 모든 것에서 자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최고의 법으로 완전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면 자유 할 수 있습니다(마 5:17). 율법의 조문을 따라 심판받을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게 하는 최고의 법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자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랑의 계명이 자유의 법입니다.
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긍휼’(‘엘레오스’, ἔλεος)은 가끔 ‘동정’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긍휼은 사랑의 다른 말입니다(엡 2:4, 고전 13:1-13).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사랑)에 의해 구원을 받았습니다(엡 2:4-6).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외모를 보고 사람을 차별하거나 불쌍한 고아와 과부에 대해 긍휼을 베풀지 않는 것은 사랑의 법을 행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 즉 긍휼 없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마 25:41-46).
또 야고보는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사망)을 이겼듯이 우리가 베푸는 사랑도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긍휼로 사망이라고 하는 심판을 이긴 것을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이 미움과 시기, 원수 맺는 것과 같은 죄를 이길 수 있음을 자랑하고, 또 죄를 이기게 해 주신 주님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베푸는 긍휼은 영혼을 구원하는 동기도 됩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베푸는 긍휼로 사람을 구원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긍휼(사랑)을 베푸는 것은 구원받은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는 증거입니다. 구원 얻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긍휼로 이웃을 대하고 구원으로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특별한 대우를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차별하여 대한다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키는 것에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 실천에 실패하면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이 되고, 또 사랑 실천을 요구하는 율법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한 우리를 범법자로 정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 자유하게 하는 법을 따라 긍휼을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긍휼이 있을 때, 형제를 구원할 마음이 생기고,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며, 구원하기 위한 말을 하며,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서 나는 긍휼을 원한다면 그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욘 4:11-12, 롬 12:8, 유 1:2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수많은 차별과 혐오가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남녀의 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외모에 의한 차별, 학벌에 의한 차별, 장애자에 대한 차별,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차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 지역에 따른 차별, 사회적 약자를 돕는 시설을 혐오 시설이라고 말하는 등 각종 차별과 혐오가 있는 세상에서 차별을 당하기도 하고, 또 사람들을 차별하며 살고 있습니다. 내 편, 네 편을 나누어 차별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행동했던 차별을 성경은 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하고, 업긴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실제 생활에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본성 때문입니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최고의 법, 예수 왕의 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 최고의 법을 따라 살면 사람을 차별할 수 없습니다. 그 법을 따라 살면 사람을 업신여길 수 없습니다.
주님의 복음은 어떤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구원을 얻게 합니다(롬 1:16, 3:22, 고전 1:21-24). 그래서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고, 오히려 긍휼로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최고의 법을 따라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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